정년을 1년 앞둔 서울 A초등학교 교장은 얼마 전 씁쓸한 경험을 했다. 한 학부모로부터 며칠 뒤 교장실로 찾아 갈 테니 기다리고 있으라는 전화를 받았다.
30대쯤 돼 보이는 학부모는 다짜고짜 담임선생님이 전달하는 알림장에 불만이 있다며 찾아오겠다고 했다. 자초지종을 물을 새도 없었다. 막말에 가까운 학부모의 ‘대기 통보’에 교장은 어처구니가 없었다.
학부모 전화 "학교 찾아갈테니 교장실서 기다려라" 통보
괘씸한 생각이 들어 “상대가 누가 됐든 방문을 하려면 사전에 양해를 구하고 일정을 맞추는 것이 기본 아니냐. 알림장에 의문이 있으면 담임선생님을 만나는 것이 우선이지 무턱대고 교장부터 찾는 것은 순서가 잘못됐다”고 말해줬지만 40년 교직생활에 회의가 드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언제부턴가 학교에서 사안이 발생하면 학부모는 왕이다. 억지 민원이라도 생떼를 부리면 학교는 속수무책 당하기 일쑤다. 민원인은 ‘슈퍼 갑’, 학교는 ‘을’일 뿐이다.
심지어 학부모가 교사를 폭행하고 교무실에서 난동을 피워도 학교는 늘 죄인처럼 움츠러드는 것이 현실.
문용린 교육감이 초등교장들과 가진 간담회에서 심각한 표정으로 발언 내용을 듣고 있다.
문용린 서울시교육감은 22일 오후 서울시교육청 906호 회의실에서 정년 퇴임을 앞둔 서울시내 교장 15명과 교육현안에 대한 간담회를 가졌다.
이 자리에서 교장들은 ▲각종 민원에 시달리는 일선학교들의 고충 ▲퇴직 예정교장 감사제 개선 ▲학교 비정규직 운영 ▲교원 정년 연장 ▲교감과 수석교사 갈등 등 학교 현안에 관련된 의견을 봇물처럼 쏟아냈다.
문용린 교육감 " 학교자율성 얽매는 규제 과감히 풀겠다"
문 교육감은 “교육감으로서 무슨 일을 하면 좋겠는지 학교 현장의 이야기를 충분히 들었다”면서 “지적 사항을 깊이 명심하고 단위 학교의 자율성을 얽매는 각종 규제들을 과감히 풀어나가겠다”고 다짐했다.
간담회가 시작되자 자신의 민원 수난 사례를 소개한 B 교장은 “학부모가 교육청에 민원 전화 한 통하면 그때부터 학교는 답변서 내랴 수습하랴 온갖 고통에 시달리는 구조가 된다”고 고충을 털어왔다.
그는 “학부모는 사소한 것이라도 무조건 교육청에 민원부터 집어넣고, 학교는 쩔쩔매는 악순환이 반복되면서 교권은 추락하고 학교는 불신과 무시의 대상이 되고 말았다”고 꼬집었다.
민원만 발생하면 교육청이 학교를 들들 볶는 통에 오히려 학부모들이 학교를 우습게 보는 꼴이 됐다는 것이다.
정년퇴직을 1년여 앞둔 C 교장은 연례행사처럼 실시되는 퇴직교장 특정 감사에 모욕감을 느낀다며 제도 개선을 요구했다. 그는 “40여 년 교직 생활을 마무리 짓는 교장들을 위로는 못할망정 이들에게 전방위 감사를 벌이는 것은 지나친 처사”라고 주장했다.
퇴직 앞둔 교장 예우는 못할 망정 처벌 위주 감사 '모욕적'
교육과정에서부터 학교 시설관리까지 모든 책임을 떠안는 교장에게 묻는 것은 처벌이나 다름없다”는 그는 "퇴직 앞둔 몇 개월 동안이 그토록 길게 느껴 졌다는 선배 교장들의 말을 지금 실감하고 있다”고 말했다.
정년이 4개월 남았다는 D 교장은 “학교가 너무 불안해 어서 빨리 떠나고 싶다”고 속내를 털어놨다. 새벽 돌봄부터 밤 9시까지 아이들을 학교에서 보호하다 보니 언제 무슨 사고가 날지 몰라 항상 긴장하게 된다고 했다.
학교 비정규직 관리의 어려움을 호소하는 목소리도 많았다.
E 교장은 “교사는 5년, 교장은 4년, 교감은 3년마다 학교를 옮기지만 무기 계약직인 비정규직들은 학교 터줏대감처럼 텃세를 부리고 있다”며 “이들에 대해서도 순환근무제 등 새로운 관리 수단이 마련됐으면 좋겠다"고 주문했다.
"교원 정년 65세 원상 회복 시급하다" 한 목소리
62세인 교원 정년을 65세로 연장해야 한다는 데에는 교장들 모두 기대감과 함께 조속한 시행을 촉구했다. 자신들은 해당 사항 없지만 유능한 후배들이 정년에 걸려 교단을 떠나게 되는 것이 너무 안타깝다고 했다.
F 교장은 “정부에서 교원 정년에 대한 의견수렴을 여러 차례 해갔는데 정년을 연장하려면 단축 때처럼 한꺼번에 3년을 늘려 주면 좋겠다”고 희망했다.
교감과 수석교사 관계를 놓고 교장들을 기대보다 우려를 나타냈다.
G 교장은 “교감 업무추진비는 25만 원, 수석교사 연구수당은 40만 원이다. 여기에 학교장학 업무를 수석교사가 맡는 경우가 많다”면서 “그러다 보니 교감은 공문 처리나 민원 담당으로 전락해 버린 느낌”이라고 말했다.
그는 “교감을 이렇게 푸대접할 바엔 차라리 없애는 게 낫다”고 비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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