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갑부

명지전문대학 명예교수, 교육학박사

기업에서는 오래전부터 ‘수요자(고객) 중심’의 경영을 실천하고 있다. 기업 역시 처음부터 고객을 중시했던 것은 아니고 공급자가 만든 제품을 어쩔 수 없이 고객이 구매하여 사용한 적이 있었다. 소품종 다량생산 체제에서 고객이 선택할 수 있는 여지가 많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제는 고객의 편의성과 효용성 등을 고려하여 제품을 만들지 않으면 생존하기 어렵다. 다품종 소량생산으로 고객의 욕구를 충족시켜야 한다. LG전자 사장으로 은퇴한 이영하 박사가 저술한 『세계 1등은 다르게 일한다』라는 책에는 고객에 관한 내용이 하나의 장(5장)을 구성할 정도로 높은 비중을 두고 있다. “판단 기준을 고객의 입장에 놓고 생각하면 정확히 결정할 수 있다.”라는 것이 가전 업계를 세계 최고로 만든 이 사장의 고객 중심의 경영관이라 할 수 있다.

기업에서보다 교육계는 ‘학습자(고객) 중심(learner-centered)’이란 말이 절박함을 느끼지 못한다. 기업은 손익이 곧바로 결정되지만, 교육계는 그 결과가 시간이 지난 후에 나타나기 때문이다. 오래전부터 ‘학습자 중심 교육’이란 말이 교육계에서 유행어로 사용되었지만 정확한 의미를 이해하는 사람은 그다지 많지 않다. 막연히 학습자를 교육 활동의 중심에 위치시켜야 한다는 의미로 이해하고 있는 사람들이 많다. 맞는 말이다. 교육 활동에 있어서 학습자를 중시하자는 것이다. 학습자를 교육 활동의 중심에 둔다는 것은 이론상으로는 이해가 가지만, 구체적인 실천 방안으로서는 추상적인 개념에 머물 뿐이다. 그 반대 개념으로서 교사 중심 교육은 교육의 기획으로부터 교수-학습, 평가에 이르기까지 모든 과정을 교사가 주도적으로 조직하고 실천하는 것이다. 이때 교사의 역할은 기존의 지식, 그러니까 교과서에 나와 있는 지식을 학생들에게 효율적으로 전달하는 비유컨대, ‘집배원’역할을 수행하면 최고의 교사로 인정받았다. 브라질의 교육자인 파울로 프레이리(Paulo Freire)는 이러한 교육을‘은행저금식 교육(banking education)’이라고 비난했다. 이러한 유형의 교육에서 교사는 학생의 머리에 지식을 주입하고, 학생은 그것을 암기하는 식으로 진행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는 학생의 창의성을 기대하기 어렵고, 순응적인 인간을 기르는 것이 고작이었다. 1956년에 개발된 벤저민 블룸(Benjamin Bloom)의 교육목표 분류(texanomy of educational objective)는 인지적 영역을 6개의 하위 영역으로 분류하고, 최종적인 목표를 ‘평가’에 두었던 것은 교수자 중심의 교육을 상징적으로 나타낸 것으로 볼 수 있다.

하지만 이러한 형태의 교육은 특히 창의력이 요구되는 지식정보사회에 있어서는 교사가 모든 지식을 학생들에게 ‘전달’하는 것이 불가능하다. 학습자가 자신이 필요한 것을 찾아서 자기 것으로 만들고, 더 나아가 그것을 응용하여 새로운 지식을 만드는 역량을 길러야 한다. 교사는 지식 전달자가 아니라 학습 분위기의 촉진자(facilitator)․도우미(helper) 등의 역할을 수행해야 한다. 교사는 문제를 제기하고 학습자들이 그것을 해결해 나가도록 도와주는 역할을 해야 한다. 이것은 파울로 프레이리가 말하는 ‘문제제기식 교육(problem-posing education)이다. 2001년에는 교육목표 분류의 인지적 영역 최상위 단계를 ‘창조하다’로 수정한 것은 교육목표가 창의성을 중시하는 방향으로 나아간다는 것을 반영한 것이다.

그렇지만 여전히 학교는 학생들에게 인지적 영역만을 강조하여 단편적인 지식을 많이 주입한 학생을 우수하다고 평가한다. 아직도 교사 중심의 암기식 교육이 세를 얻어 일류 대학에 몇 명이 합격했는지를 따져서 교사와 학교를 평가한다. 학교가 소수의 학생들에게 지식을 주입하는 곳이 되어 대다수 학생들이 학습에서 소외되고 있다. 얼마 전 자율형 사립고등학교인 중동고등학교 이명학 교장 선생님이 학부모에게 보낸 편지가 잔잔한 여운을 남긴다. “고등학교는 서울대 많이 보내는 곳이 아니라 사람을 키우는 곳입니다.” 그렇다. 학습자 중심 교육은 사람을 키우는 교육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