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갑부

명지전문대학 명예교수

교육학박사, 시인

설을 지낸 지가 벌써 며칠이 지났다. 코로나가 더욱 기승을 부리는 이번 설은 고향에 가지 못하고 ‘방콕’한 사람들이 많았을 것이다. 나 역시 가족들과 오붓한 시간을 보내며 아쉬움을 달랬다. 양력이든 음력이든 해마다 연말이 되면 지난 한 해에 이루지 못한 일들에 대한 아쉬움과 한 살 더 먹는다는 서러움이 교차하는 시간을 보내게 된다. 한 해를 되돌아보며 이루지 못한 일들에 대한 반성과 후회를 하면서 부족한 점을 채우리라는 다짐을 하며 새해를 맞는다.

새해가 되면 사람들은 지인들과 덕담(德談)을 주고받는다. 상대방에게 건강과 행복, 만사형통(萬事亨通) 등의 의미를 담은 덕담을 건넨다. “육당(六堂) 최남선 선생에 의하면, 본디 덕담은 지나간 사실을 들어 축하하는 의미였다. ‘그렇게 돼라.’라고 축원해 주는 것이 아니라, ‘그렇게 되었다니 축하합니다.’라는 것이 덕담의 뜻이었다. 세월이 지나면서 덕담의 성격이 과거형에서 미래형으로 바뀐 것이다.

연초(年初)에 가장 많이 하는 덕담은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라는 말일 것이다. 새해가 되면 고장 난 축음기처럼, 누구에게나 이 말을 되풀이한다. 사실 복(福)이란 매우 추상적이어서 감을 잡기 어렵다. 우리 조상들은 장수(長壽)·재물(財物)·관운(官運)·강녕(康寧)·다남(多男) 등 다섯 가지를 오복(五福)이라 하였다. 오복은 인간이 추구하는 가치로운 것들이 거의 들어 있다. 이렇게 좋은 것이 이루어지라고 하는 의미의 덕담은 많이 들어도 지겹지 않고, 꼭 그렇게 될 것 같은 예감마저 든다.

조선의 후기의 문신이었던 서석(瑞石) 김만기(金萬基, 1633-1687)는 숙종의 장인이고, 「사씨남정기」와 「구운몽」으로 유명한 서포(西浦) 김만중(金萬重)의 형이다. 그의 집안은 대대로 부귀를 누렸던 명문가였다. 우암(尤庵) 송시열(宋時烈)과 같은 대학자를 제자로 둔 김장생(金長生)의 증손이었고, 숙종이 세자로 있을 때 딸을 시집보내 광성부원군(光城府院君)이 되었다. 어느 해 봄 그의 집에 ‘만사여의(萬事如意)’라고 쓴 입춘첩(立春帖)이 나붙었다. ‘모든 일이 뜻과 같다’는 뜻으로, 만사형통과 유사한 의미를 품고 있다. ‘입춘대길(立春大吉) 건양다경(建陽多慶)’과 같은 입춘첩을 붙이는 것이 보통이었으나 뜻밖의 글귀에 김만기의 아들 김진규(金鎭圭)는 깜짝 놀랐다. “이 입춘첩을 누가 썼느냐? 사람이 세상에 나서 한 두 가지도 마음먹은 대로 하기가 어려운 데, 모든 일을 마음먹은 대로 이루게 해 달라니, 조물주가 꺼릴 일이 아니겠는가? 우리 집안이 장차 쇠망하겠구나.”얼마 후 정치적으로 수난을 당하고 유배 가서 몰락하고 말았다. 중국 송나라 학자인 호안국(胡安國)이 말했다. “집안에서 가장 불필요한 것은 일마다 뜻대로 되는 것이다. 일은 늘 부족한 것에 있어야 좋다. 일마다 뜻에 흡족하면 문득 좋지 않은 일이 생겨나는 것을 여러 번 시험해 보았다.”

‘만사여의!’그렇게 될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지만 그것은 신에게만 주어진 특권일 뿐이다. 무슨 일이든지 충만한 것보다 조금 모자란 듯한 것이 희망의 가능성이 있어서 좋다. 보름달은 밝은 듯하지만 기울어야 하는 아쉬움이 있고, 재산이 많으면 가족 간 갈등으로 패가망신한다. 과유불급(過猶不及)이라 했듯이, ‘지나침은 오히려 부족한 만 못하다.’ 올 한 해는 욕심부리지 말고 조그만 것에 만족하면서 살자.

재직 시절 우리 대학에 신설된 교수학습개발원장직을 맡았을 때 같은 부서에서 행정 일을 담당했던 당시 김 과장은 내가 보직을 그만두고 학과로 돌아온 이후에도 매년 내 생일이 되면 잊지 않고 문자를 보내거나 선물을 보내곤 했다. 이해관계가 있을 때 과도한 선물을 보내어 은근히 대가를 바라는 일은 흔하지만, 그렇지 않을 때 작은 선물이라도 보내는 것은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퇴직한 나에게 올해도 빠짐없이 그가 카톡 앱으로 보낸 선물로 커피 한 잔을 마시며 삶의 보람을 느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