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교육 취약계층 학생들
수락산고등학교로 자리를 옮긴 정윤혜 교사는 지난해까지 서울북공업고등학교에 있었다. 정 교사가 맡은 학생들의 학력 수준은 대개 중학교 성적 95% 내외를 유지했다. 반 학생 대다수가 학습부진아였다. 일반 초등학교나 중학교 각 교실에 한두 명 있을법한 학습부진아, 수업 분위기 해치는 산만한 학생, 거칠고 무례한 학생들이 모두 모여 있는 격이었다. 더불어 상당수가 기초생활수급자이거나 한부모 가정 또는 차상위 계층 등 사회의 빈곤층이었다. 어린 시절부터 부모의 보살핌을 적절하게 받지 못했거나 부모와 사이가 좋지 못했다. 칭찬이나 인정받은 경험은 드물었고, 자존감은 보이지 않았다. 학생들은 고등학교 졸업장 하나 따는 게 학교 다니는 목표인양 행동했고, 공부해야 할 이유를 알지 못했다. 학생들에게 중견교사로서의 경력이나 나름의 교육 철학, 방법이 통할 리 만무했다.
동시에 학생들은 이중적이었다. 주변 자극에 과도하게 반응하면서도 한편으론 웬만한 변화에 반응하지 않고 감정 없는 것처럼 행동했다. 그러다 타인에게 무시 받았다고 생각하면 감정이 폭발했다. 그렇게 한 번 터지면 교사도 친구도 제지할 수 없었다. 정 교사는 혼란과 회의를 거듭했다.
또래에 비해 기초 실력과 의지가 현저히 떨어지는 학생들을 인문계와 똑같이 가르치는 건 처음부터 무리였다. 그쯤 우연히 학생들에게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 만화판을 읽혔는데 잠자던 학생들이 고개를 들고 책을 일는 모습이 목격됐다. ‘아홉살 인생’ 만화판도 학생들에게 호응을 얻었다. 정 교사는 그때 알았다. 학생들의 수준에 맞는 읽기 텍스트를 선정하는 것이 최우선이라는 것을.
만화책으로 학생들의 무기력에 도전하다
교과서 수업을 과감하게 접고 독서교육이 시작됐다. 기존 국어시간 편제를 학교의 동의를 얻어 과감하게 바꿨다. 일주일의 국어시간 4시간 중 1시간은 학교도서관에서 학생들에게 책을 읽혔다. 1학년은 1주일에 1회 필수로 학교도서관을 이용하고 이외의 시간은 교사 재량에 따라 사용하기로 했다. 학생들에게 걸맞은 권장도서도 만들었다. 줄글로 된 책은 읽을 엄두조차 내지 않는 학생들을 위해 부담이 적은 만화책과 그림책을 선별했다. 학습과 정서 등 복합적인 문제를 감안했을 때도 그림책이 가장 알맞다고 판단했다.
학생들의 독서 수준은 대체로 ‘우동 한 그릇’ 정도의 글을 읽어내는 정도였다. 처음부터 글이 많은 책을 읽히는 것보다 우선 교육적으로 권할 만한 만화책이나 그림책을 시작해 차차 독서의 단계를 높여가야 했다. 정 교사는 그림이 주를 이루는 만화책과 그림책으로 학급문고를 꾸렸다. ‘도토리의 집, 이희재의 만화 삼국지, 삼봉 이발소, 식객, 아낌없이 주는 나무, 나의 라임오렌지나무, 너는 특별하단다, 가방 들어주는 아이, 그대를 사랑합니다, 순정만화, 문제아, 간판스타, 된다 된다 나는 된다, 얼굴 빨개지는 아이’가 1~3학년 수준에 맞게 선별됐다.
도서관에서 학생들이 책을 다 읽지 못한 경우 북박스에 책을 넣어 교실에서 마저 읽도록 했다. 학생들이 읽는 책 중에는 만화책, 그림책이 포함되어 있어 한 학기에 10권 내외 책을 읽을 수 있었다. 간단한 독후감 쓰는 것은 글쓰기를 꺼리는 학생들이 있어 간단한 문제를 내 사실 확인을 대체했다. 처음에는 정 교사가 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학생들이 직접 낸 문제를 정리해 시험문제로 만든 것에 학생들이 훨씬 흥미를 느꼈다. “여민이가 그린 그림의 제목은?”(박어진), 골방 철학자가 산에서 잡아 먹은 것은?(서다솔), 뚱딴지 영감이 박씨의 집에서 뺏어 간 물건은?(안석현) 등이 대표적이었다.
수업시간에 창작시 도전하기
정 교사는 학생들에게 시를 쓰게 했다. 미래가 없는 것처럼 행동하고, 그때의 욕구대로 뱉듯이 사는 삶에 제동을 걸고 싶었다. 긴 글쓰기에 엄두도 못 내던 학생들도 시는 일단 짧다니까 해보려했다. 또래의 학생들이 쓴 시들을 여러 편 보여준 것도 주효했다. 몇 가지 방법도 일러줬다. 적어도 세 번은 고친다, 최근에 가장 불편했던 일이나 마음을 움직였던 장면을 기억한다, 그 장면을 사진 찍듯 생생하게 떠올리려 애쓴다, 사랑해, 고마워처럼 눈에 보이지 않는 단어들은 보이는 상황으로 바꿔 쓴다, 단골로 등장하는 매일, 언제나, 항상 표현은 걷어낸다. 학생들의 자신의 이야기를 시로 옮겼다.
‘겨울이 오면 모든 학생들이/ 노스패딩을 입는다/ 왜 노스만 입을까/ 다른 패딩들도 많은데/ 노스는 비싼데, 담배 빵 당하면 터지는데/ 노스는 간지템 비싼 노스 안에 내 몸을 숨기고/ 무엇이라도 된듯하게 당당하게 거리를 걷는다/ 한 겨울에 노스만 입어도 무서울 게 없다’(노스패딩, 류연우)
‘짐을 쌌다/ 겉옷 한 벌 속옷 한 벌/ 새벽 2시 집을 나갔다/ 해가 뜰 때까지 동네를 돌아다녔다/ 아는 형이랑 부산에 갔다/ 찜질방에서 시간을 때우다가/ 피시방에서 시간을 때우다가/ 노래방에 가서 또 시간을 때웠다/ 가출도 반복된 일상/ 학교처럼 지겨워졌고 돈도 떨어졌다/ 집에 돌아오는 것은 최후의 수단이었다’(가출, 김부찬)
담임교사를 쓴 시도 수상작에 올랐다. ‘담임은 우리가 떠들면 운다/ 우리가 다른 선생님 시간에/ 떠들어도 서럽게 운다/ 그냥 쪼금만 잘못해도 운다/ 우리 담임한테 대들다가 혹시라도/ 담임이 울면 우리는 불리해진다/ 내일도 담임은 울 삘이다’(우리담임, 김동진)
학습부진아들이 자신의 진솔한 이야기를 꺼내놓을 수 있는 기회로 시 쓰기만큼 좋은 프로그램은 없었다. 그렇다고 이 프로그램이 모두 성공사례는 아니다. 그저 하나의 시도일 뿐이다.
정 교사는 “초등학교와 중학교 내내 책 한 권 제대로 읽은 적이 없는 학습부진아 고교생에게 적합한 독서프로그램은 딱히 없는 실정"이라며 "학습부진은 독서력과 밀접하게 연관돼 있다"고 말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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